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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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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건립되었던 율곡기념관이 헐리고 지어지기를 반복하다 2012년 10월 21일 재건축하여 재개관하게 되었다.
전시관에는 오죽헌 소장유물에 이창용 전 서울대교수가 기증한 유물을 더한 신사임당, 율곡 이이, 옥산 이우, 이매창, 고산 황기로의 작품과 이우 후손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사임당 작품으로는 채색 [초충도]와 수묵화, [초서]·[전서] 등의 글씨가 전시돼 있으며, 이이의 유품으로는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술한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과 정조대왕이 어람한 뒤 어제 어필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 [벼루], 그리고 그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다.
매창 작품으로는 [참새]를 비롯한 서정성이 짙은 수묵화와 조선중기의 묵매양식을 잘 보여주는 [묵매도],
이우의 작품으로는 빠르면서 대담하고, 다소 거친 듯 하면서도 분방한 필선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과 글씨가 전시돼 있다.
황기로의 작품으로는 조선시대 초서의 대가답게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는 보여주는 [초서-이군옥 시]와 [초서가행 원석]이 전시돼 있으며 그 외 옥산 학정공파의 사회적 지위·문화적 교유·예술적 역량을 읽을 수 있는 덕수 이 씨 후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율곡기념관은 옥산 이우선생의 14대손 이장희 선생께서 1965년 사임당초충도 등을 기증하였고, 2009년 16대손 이창용 선생과 가족들이 566점의 유물을 기증해 주어 2012년 새롭게 문을 열게 되었다.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을 배출 해 낸 ‘덕수 이 씨 가문’의 유물을 통해 그들의 예술혼과 선비 혼을 감상해 볼 수 있다.
보물 제165호인 오죽헌은 우리나라 민가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건축물로 조선시대 민가 별당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로 유명한 오죽헌은, 원래 병조참판을 지낸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습니다. 최응현은 이곳을 둘째 사위 이사온에게 상속하였고, 이사온은 그의 딸, 용인 이씨에게 상속하였다.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는 그녀의 넷째 딸의 아들인 외손자 권처균에게 집을 상속해주었다. 권처균은 집 주위의 검은 대나무를 보고 자신의 호를 까마귀‘오’에, 대나무‘죽’, 집‘헌’을 써서 ‘오죽헌’이라 지었고, 이 집의 이름도 ‘오죽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글과 그림에 뛰어났던 사임당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주변의 사물을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사임당은 산수·포도·대나무·매화·영모·초충 등의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곤충과 식물을 조화롭게 그린 초충도가 가장 유명하다. 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린 후 그림을 말리기 위해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때 마침 마당에서 놀던 닭이 그림 속 벌레를 쪼았다는 일화는 그녀의 그림이 매우 섬세하고 정밀하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남성 화가들에게서 는 찾아볼 수 없던 여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운 묘사, 거기에  더해진 화사한 채색으로 <초충도>는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11호인 <초충도 병풍>, <습작매화도>, <초서병풍> 등의 작품을 통해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감상할 수 있다.
 율곡 이이는 사임당의 칠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사임당에게 글을 배웠으며 어릴 때부터 효심이 깊고 총명하였다. 어머니를 곧잘 따랐던 열여섯 살의 이이에게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이이는 어머니 묘를 삼년간 돌봤고, ‘시묘 살이’를 마친 후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며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이곳 오죽헌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을 지어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그 후 스물아홉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구도 장원 공’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명종실록』편찬 및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 과 같은 국정 개혁안을 편찬하였으며, 마흔 두 살 에는 조선후기에 크게 활용되었던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격몽요결』>을 저술 하였다. 또한 ‘은병정사’라는 학교를 건립하여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였고, ‘이’와 ‘기’가 하나라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고유의 성리학을 발전 시켰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율곡 이이 선생의 묘는 파주 자운산 선영에 어머니 사임당의 묘와 함께 있으며, 전국 20여개 서원에 위패가 모셔져있다. 조선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교육자였던 율곡 이이의 삶을 통해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깊이를 느껴볼 수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어머니 사임당의 교육 혼을 이어 받았다면, 매창과 이우는 어머니의 예술혼을 이어 나갔다. 작은 사임당이라 불릴 정도로 재주와 학식이 깊었던 첫째 딸 매창은 율곡 이이가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물을 정도로 매우 총명하였다. <매창화첩>에 수록 된 <참새>, <달과 새>등 그림은 “그 어머님에 그 딸 이다.”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줄기가 가려질 정도로 짙게 깔린 연무 속에서도 의연히 꽃을 피운 매화나무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웠던 조선시대, 그녀의 기상과 총명함을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어머니 사임당에 못지않은 매창의 수묵화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막내아들 이우는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옥산 이우의 서체는 어머니 사임당의 서체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열다섯에 쓴 <초서–귀거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질이 어질고 후덕하였다 전해지는 옥산 이우의 문사는 고고하면서도 힘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글과 그림을 직접 가르치며, 그들을 훌륭한 사상가, 교육가, 예술가로 성장시킨 사임당을 통해 올바른 부모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옥산 이우의 장인, 고산 황기로의 작품들, 고산 황기로의 글씨는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초서체’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초서체란 곡선 위주의 흘림체로 된 한자의 서체 중 하나로, 붓의 속도, 먹의 정도, 글씨의 크기, 글 획의 부드럽고 곧은 정도 등에 따라 서체의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심오한 서체이다.
조선 초서체의 대가인 장인 황기로와 글과 그림에 능했던 사위 이우를 통해 글로 하나 된 두 집안의 예술을 감상해 볼 수 있다. 집안의 혈통과 역사를 기록한 기록물 ‘세보’를 전시한 이곳은 “덕수 이씨 세보 수진본”이 전시되어 있다. 시조 ‘이돈수’부터 19대 후손 ‘이수해’까지 덕수 이씨 가계가 정리된 세보는 소매 속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게 접어 장지로 만든 외갑에 넣어 보관하였다. ‘덕수 이씨’세보는 가문의 계보는 물론 사회상, 풍습을 기록하고 있어 역사적 사료로도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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