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 오죽헌

본문 바로가기

율곡 이이

본문

(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음력 1월 16일)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임당의 친정집 별채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에서 생활하였다.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꾸준히 이황, 조식, 성혼, 정철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연구하였고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으며,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하곤 했다.
또한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는데, 그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 내 세력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본의 도발에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려 경륜와 소신을 펼칠 기회가 부족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동인의 집중 탄핵으로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였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서 요양하던 중 차도가 없음을 알고 한성으로 내려왔으며, 1584년(선조 19년) 음력 1월 16일 새벽 한성부 대사동(大寺洞) 자택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고 한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선영에 장사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그의 부인 곡산 노씨는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전쟁 후에 율곡묘 뒤 용미에 봉분을 만들었다.
SNS 공유 맨위로